한산도 대첩 학익진 이치전투
1592년 7월 8일, 이치 전투가 일어난 날에 바다에서는 한산도 대첩이 치러졌다. 한산도 대첩이 치러질 때에 이순신의 함대는 96척이었고 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는 73척이었다. 이억기와 원균의 함대와 합류한 이순신은 7월 7일 와키자카의 함대가 매우 폭이 좁은 견내량에 들어서고 잇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순신은 판옥선이 암초가 많고 좁은 견내량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판옥선 약 5척에게 왜군을 공격햇고 한산도 쪽으로 후퇴하면서 유인하는 정책을 썼다. 이 작전이 통하자, 이순신과 이억기, 원균의 함대는 학익진(주로 육지에서 많이 스는 포위, 섬멸 형의 진)으로 왜군을 포위하여 공격했고 결국 왜군의 함대 중에서 47척이 격침 되고 12척이 나포되었고 왜군 약 4000명이 전사하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4척을 이끌고 후퇴했다. 와키자카 사헤에와 와타나베는 전사했고 마나베를 포함한 왜군 400명은 한산도로 도망쳐서 살았고 마나베는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할복한다. 그에 비해서 조선군의 피해는 단 3명이 전사한 것 뿐이었고 이 한산도 대첩은 행주 대첩, 1차 진주성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불린다.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7일과 7월 8일의 조선군이 한산도와 이치에서 왜적들을 쳐부순 날이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 것은 와키자카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니 이 두 왜장은 히데요시가 세 함대를 연합하라고 했기 때문에 결국 합세한 것 이다.
월래 왜군은 견네량에다가 왜선들을 놓았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급습하더라도 육지가 코앞이라 패한다면 육지로 도주할 수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이순신은 바다가 한가운데인 곳을 선택했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47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7월 7일 작전 대로 5~6척의 판옥선은 견네량에서 왜군들을 한산도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대죽도와 미륵도 등지에 숨어 있던 조선군은 왜군들이 유인책대로 유인되자 숨어 있던 병선들은 신속히 노를 저어 나와 'ㅡ'자 형태로 돌려서 학인진을 형성했다.그리고 화포 장전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포탄은 왜선들을 마구 포격했고 왜적들은 그걸 맞고 날라가는 등 전투는 계속되었다.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사상자 최소 8천에서 1만명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목을 세는 단위?),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로 승서되었다.
와키자카는 자결의 벌을 받게 되지만 태합은 봐주게 된채 전 수군은 모두 부산포로 집결해 싸움을 하지 못하게 지시를 내린다.
이 무렵 이치(전라북도에 속함)대첩은 시작되고 있었다.
1592년 7월 1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군이 전라도를 침범하기 위해 무주를 점령하고 금산으로 쳐들어왔다. 원래 왜군은 창원에서 함안, 의령, 함양을 거쳐 남원, 전주로 진격하려 했으나 의령에서 홍의 장군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부대에게 패배를 당하자 진로를 바꿔 거창, 황간을 거쳐 무주, 금산으로 공격해온 것이었다. 왜군이 금산에서 전주를 노린다는 보고를 받은 권율은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대장 황박, 김제군수 정담에게 웅치를 지키도록 지시하고, 동복현감 황진에게는 이치를 먼저 점령하도록 명한 뒤 자신도 군사를 거느리고 이치로 향했다.
7월 7일부터 8일까지 이틀 동안 밤낮없이 계속된 이 전투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 관군 1천 5백여명은 1만이 넘는 왜적의 대군을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마침내 크게 무찔러 격퇴시켰는데, 아군의 피해는 정담과 그의 종사관 이봉, 그의 비장 강운과 박형길등 전사자 11명에 불과했다. 이 싸움에서 권율은 적군의 눈에 잘 띄는 금빛 투구를 쓰고 금빛 갑옷을 입고 최전선에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병들을 환도로 베어 넘기며 독전을 했다고 한다.
수성장 권율이 대포를 쏘고 도망치는 병사들을 참수하여 왜군을 막았고, 특히 부장 황진의 활약은 눈부셨다고 한다. 그러나 황진이 왜군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자 왜군은 이틈을 노려 목책을 부수고 쳐들어왔으나 권율의 예비대 공격으로 크게 패해 물러났고 황진은 부상을 무릅쓰고 선봉에 나아가 적군과 맞서 싸웠다. 게다가 호남 의병장 고경명이 의병들을 이끌고 금산을 압박하면서 왜장 고바야카와는 결국 후퇴하고 만다. 권율이 거둔 최초의 승리인 이치전투로 왜군의 육로를 통한 호남 침범의 야욕은 봉쇄되고 말았다. 승전보를 받은 의주의 선조는 다음달에 권율을 나주목사에 임명했다가 곧 전라감사 겸 순찰사로 승진시켰다. 권율은 황진에게 그대로 남아서 이치를 지키게 하고 전주로 이동하여 1만여명의 군사를 모집하자 그해 9월에 임금이 있는 의주로 가기 위해 북상했다.
그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을 점령하여 주둔 중이었고, 구로다 나가마사는 해도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개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또 왜군의 총사령관인 우키다 히데이에는 이미 점령한 서울에 주둔하고 있어서 대동강 이남은 전라도만 남기고 모두 왜적의 수중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 이치전투와 한산도 대첩으로 조선군의 사기는 올라갔다.
한편 7월 17일 명나라의 군사 5천여명은 압록강을 넘어 김명원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한다 이것이 제2차 평양성 전투이다 (제1차 평양성 전투는 왜군이 평양성을 공격한것) 당시 평양성에는 1만 8700명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1만 1000명의 구로다 나가마사가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은 황해도로 옮겨갔는데 이를 본 척후장 순안 군수 황원이 적의 주력 부대가 빠져 나가는 것으로 잘못 보고하여 7월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적들이 보이지 않자 명군의 선봉장 사유는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병력을 모두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켰고 이것이 치명적인 패배의 원인이 되어 길 양편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조총 사격으로 크게 패해 사유가 일본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전사하고 부장 천총과 장국충 등도 전사하였다.
결국 부상까지 입은 조승훈은 수십 기의 남은 병력만 이끌고 7월 18일 요동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조선군 3천과 명나라군 3천은 거의 전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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